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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습관 만들기/요리

요리를 해먹는다는 것의 의미

by peregrina_ 2021.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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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오랜 만에 냉장고를 열었다. 버릴 것은 버리고 닦아낼 것들은 뽀드득 씻어냈다. 전보다는 비워낼 때 드는 감정에 많이 무뎌진 것 같기도 하고 이젠 애초에 냉장고를 그리 채워두지 않는 편이다. 자취를 시작하고 이렇게 불가피한 '비움의 시간'을 마주하면서 내게 '식(食)'의 의미는 점점 더 특별해졌다.

대학생까지만 해도 먹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적당히 맛만 있으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충분했고, 여행을 가서도 삼시세끼를 잘 챙겨 먹기보단 그곳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것을 더 선호했다. 아마도 '먹는다'는 것을 살아갈 수 있는 영양소를 채우는 행위 정도로만 가치를 매겼던 것 같다.

그러다 점차 경제활동과 사회생활의 범주가 넓어지면서 전보다는 더 양질의 요리를 접할 기회가 늘어났고, 그 경험들이 쌓이면서 ‘먹는다’는 것에 대한 관점이 달라졌다. 특히 내가 나를 위해 요리하는 시간이 많아진 뒤로는 누군가 나를 위해 시간과 정성을 들여 요리를 내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있는 행위인지 이해하게 됐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나 혼자만이 주체가 되는 행동이 아니라, 그 요리를 내어주는 사람과 또는 함께 먹는 사람과 교감할 수 있는 예술적 서사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나를 위해 요리하는 시간들을 통해 일상에서 쉽게 흘려보낼 수 있는 나를 만나는 과정이 좋았다. 오늘은 무엇을 먹을지 생각하면서 내 기분이나 컨디션을 들여다보게 되고 가능하다면 건강한 한 끼를 만들어주자고 다짐하곤 한다. 내 안에 이런 온기를 품는 것만으로도 잔잔한 위로가 된다.

그런데 집에서 이렇게 요리를 해먹지 못한다는 건 돌봄의 여유가 없는 일상을 반증한다. 장보고 요리하는 데에 드는 시간과 에너지, 노력 등을 타인에게 전가하여 한 끼 식사를 사먹고 마는 것이다. 부엌용품들에서 내 손 때가 보이지 않거나 사뭇 어색함이 느껴질 때, 내 자신도 이렇게 방치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어 약간의 미안함과 서글픔이 밀려온다. 오늘처럼.

추석 연휴를 보내고 일상으로 돌아오면서 '다가오는 한 달은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잘 지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한 달이 절반 무렵 지나가고 있는 요즘, 정신을 차려보니 부표를 붙잡고 이리저리 일렁이는 내가 보였다. 힘을 아끼겠다고 배영 자세로 둥둥 떠있기도 해보고 발만 슬렁슬렁 물장구를 차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이미 진이 쏙 빠져있는 상태였다. 조물주가 일주일 중 하루를 괜히 휴일로 만든 것이 아닐텐데 한 인간이 이를 거스르려 애쓰다니, 그를 참 안아주고 싶었다.

바람이라도 쐬러 친구랑 근교로 드라이브를 갈까도 했지만 그것이 진정한 휴식이 되진 않을 것을 몸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만의 종교의식을 치르듯 집안의 엔트로피를 낮추기 위해 수 시간을 움직이고 늦은 오후에서야 프라이팬을 꺼내 들었다.


몇 달 전에 사두고는 어떻게 먹을지 마땅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손대지 못한 냉동 채소들. 새우와 대패 삼겹을 꺼내 같이 볶볶 했더니 가장 손 안 들이고도 근사한 한 끼 식사가 탄생했다. 길지 않은 조리 시간 동안에도 각각의 재료들을 보면서 생각나는 친구들이나 추억 거리가 있었는데 이런게 또 요리의 색다른 묘미가 아닐런지. 조만간 미역국도 보글보글 끓여 먹어야겠다. 시간이 되면 장도 보고 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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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오늘도 학교에 가서 할 일을 마무리 하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이 피로감과 무기력에서 빠르게 벗어나려면 일요일 하루는 조물주의 말씀을 따라야 할 것 같다. 잘 쉬고 내일 마저 해야지. (feat. 내겐 아무 의미 없는 월요일 대체공휴일..)


주말의 평화로움을 폴폴 느끼기 좋은 오늘의 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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