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하고 연구실에 다이어리를 두고 오는 바람에 블로그에 남기는 오늘 하루.
1.
아침에 Chris와 삶과 죽음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장 내일 죽게 되더라도 괜찮다는 그와 달리 나는 죽음에 있어서 두려움이 참 많다. 막상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대체 죽음의 어떤 점이 두려운걸까.
고통과 함께 생을 마무리 하게 될까봐? 아무런 작별 인사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게 슬퍼서? 아직 이 곳에서 하고 싶고 이루고 싶은 것이 많은데 이대로 손을 놓아야만 한다는게 속상해서? 막상 그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려고 하니 입 안에서 단어들이 뒤엉켰다. 결국, 나도 잘 모르겠다는 결론을 내려야 했다.
우리 언니도 그처럼 언제 죽든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자유로운 영혼 중 한 명이다. 본인이 이 세상에 온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역할을 다 했을 때 이 곳을 떠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 생각은 나도 동의 하지만.. 갑작스레 떠나는 상상만 하면 조금이라도 더 알찬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정신이 확 든다. 물론 때론 무력감이 들기도 한다. 어짜피 죽는거 이리 힘들게 열심히 살아서 뭐할까 하는..
마침 얼마 전에 완독한 소설 '모순'이 떠오른다... 삶과 죽음에 대한 모순이 인상적으로 녹아있던 책. 길게 이야기 하면 스포가 될 것 같아 뱉고 싶은 마음은 다시 삼키기로 한다. (까미노에서 만난 친구가 인생작이라며 선물해주었는데 그만한 소장 가치가 있었다. 추천.)
새삼, 인류가 그 오랜 세월 동안 지구 상에 존재해 왔다고 하더라도 전세계 70억 중 그 누구도 과거 두 세기 이상을 살아온 자는 없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친구들과 농담삼아 200년 뒤의 오늘 2222년 2월 22일에 22시 22분 22초를 기록해줄 사람 있냐고 이야기 했지만, 우리의 짧은 생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2022년 2월 22일을 재미있게 사는 것이었다.
2.
이모로부터 생각지 못하게 오아시스 배송 선물을 받았다. 엄밀히는 엄마의 동창분이지만 이모가 없는 나에겐 친이모나 다름 없는 분이다.
논문 쓰느라 힘들지 않냐며, 따뜻하게 끼니 챙겨 먹으라고 한 상자 가득 식료품들을 보내주신 이모. 바쁘단 핑계로 연락도 먼저 잘 못 드려서 죄송해 하는 나에게 더 챙겨주지 못해서 되려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는 이모. 이런 것이 내리사랑일까. 찰나에 달콤씁쓸함을 느꼈다.
그리고 졸업한 연구실 선배로부터도 생각지 못한 응원 선물을 받았다. 이 역시도 고마움과 긴장감이 교차하는 달콤씁쓸한 맛일까.
3.
어찌저찌 첫 논문의 draft of draft를 완성했다. 퀄리티는 계속 높여가야 하지만 일주일 만에 백지에서 이 정도 진척을 보인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표는 달성했다. 나름 지난번에 다짐했던 내 안의 ‘치열함’을 지켜낸 것이다.
'글쓰는 일은 업으로 삼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정말 사람 일은 모르는 건가 보다. 모 언론사에서 객원기자로 활동하던 2018/19년 당시엔 기사 투고를 통해 느끼는 효용감 보다도 마감 내에 신속, 정확성을 갖춘 글을 써내야 하는 부담감이 더 컸다. 그래서 기자로 일하는 내내 글은 취미로만 써야겠다고 다짐했는데 이듬해에 대학원 진학을 선택함으로써 그 결심은 지킬 수 없게 되었다. 그 때만 해도 아니 불과 지난달까지만 해도 학자와 글쓰기는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붙어 다니는 존재라는 걸 실감하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마지막 서론부를 채워넣으면서 비로소 느낀 건 나는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다소 반전이었다고 해야 할까. 그동안 꾸준히 여러 성격의 글을 즐겨 써온 습관이 그저 과학 지식으로 색채가 달라졌을 뿐 글쓰기의 근본적인 속성은 같겠다는 것을 느꼈다. 단지 기자에게는 시분초를 다투는 신속함이 생명이기에 그렇게 빠른 템포는 내게 알맞지 않은 것 뿐이었다고 생각한다.
+ 조만간 추가적으로 확인해야 하는 그래프가 있는데 오랜 만에 다시 코딩을 할 생각을 하니 벌써 긴장이 된다. 행여 내가 계산 실수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생각에, 코딩 보다는 글쓰기가 더 마음이 가는 것 같다. 그래도 어쩌겠어, 둘 다 잘 해야지. 그게 내 업이라면.
4.
갓 열아홉 살이 되던 때 새로 사귀게 된 대학 동기가 있다. 과는 다르지만 과 동기들을 알게 된 시기와 크게 차이도 없을 때 만났으니 꽤나 내 대학 인생에 있어서는 동기애가 짙은 친구이다. 신기하게도 학생회나 동아리 등등 우리과 동기들이랑도 꾸준히 접점이 많아서, 처음 그 당시에 함께 알게 된 친구들은 대게 연락이 뜸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와는 지난해 졸업식까지도 추억을 함께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타대 로스쿨로 떠나면서 잠시간은 그의 밝은 장래를 위해 마음으로만 응원을 해야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눈을 비비며 번호를 다시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시간이 괜찮으면 학교에서 저녁을 같이 먹자는 그. 식사 제안의 응답으로 yes/no가 아닌 "축하해!!!!!!!"가 튀어나왔다. 기어코 모교로 돌아오는 일에 성공 했구나.
함축적으로 그의 지난 1년의 생활을 들으면서 '모든 일에는 당사자성이 중요한 것 같다'는 교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의 당사자성과 관련이 있을, 그가 최근 재밌게 보고 있다는 드라마 '기상청 사람들'로 화제가 이어갔다. 나는 그 드라마를 보진 않았지만 그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드라마에 관한 궁금증들을 나름대로 답해주었다. 그리고 이 대화의 시공간은 자연스럽게 학부 시절 교양 강의실로 옮겨갔다.
개인의 전문성만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시대는 갔다.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업하는 것이 중요해진 시대에서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고 잘 소통하기 위해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대중들은 과연 어떤 전문가를 찾게 될까? 많은 전문가들이 '전문성'이 가장 중요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고객의 발길을 끄는 것은 전문가의 '친절함'에 있다고 한다. '전문성'은 당연히 갖춰야하는 요소일 뿐이었다.
그러나 변호사든 과학자든, 전문성을 인정 받는 그 자리에 가기까지 참으로 치열한 시간을 거쳐야 하는데 -때론 타인의 아픔에도 무뎌져야 할 만큼- 그들은 언제 어떻게 감수성과 공감 능력을 키울 수 있을까. 그는 정답만 외워 시험을 보고, 한 차원 깊이 생각해야 하는 문제가 나오면 틀릴 수 밖에 없는, '당사자성'이 결여 된 전문가가 많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리고 어디든 멋들어지게 포장하기 좋은 '공정'과 같은 big word를 쉽게 사용하면서, 그 개념을 정확하게 알아야 할 자가 정작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경우를 어떻게 경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이건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고민이 필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제서야 대학 교편에서, 인문계열 학생들에게는 과학적 지식을, 이공계열 학생들에게는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주기 위해 노력하셨던 몇몇 교양 수업 교수님들의 마음에 한 걸음 더 가까워 진 것 같다. 훗날 이 두 덕목을 겸비한 지도자로 거듭나고 싶다는 설렘이 오랜 만에 퍼졌다.
길지 않은 식사 시간 동안 심오하고 해학적인 질문을 던져준 친구를 만난 건 큰 기쁨었다. 숫자를 숫자로만 받아들이지 말 것, 가슴으로 이해할 것. 이것이 내가 우리의 만남을 한 줄로 정리하고 기억하고 싶은 메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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