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검진 차 서울에 오신 부모님. 추석 연휴 이후로 오랜 만에 봬서 참 반가웠다. 최근 서부간선도로가 개통된 덕분에 이제 door to door로 본가에서 자취방까지 딱 2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부모님이 아침 일찍 도착하시기로 했는데, 깊은 잠에 들어버린 탓에 오전 7시 부재중 다섯 통에 이어 여섯 번째 벨소리에야 깨어난 나..
차는 집에 주차해두고 지하철로 이동을 했는데 아빠를 볼 때마다 항상 인상 깊은건 지금 여기가 어딘지, 어느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는지 지도로 체크하신다는 것. 외국이든 국내든 예외없이 아빠는 지도를 한참 깊게 들여다 보신다. 올림픽공원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도 줄곧 지도 삼매경에 빠져계셨다.
아빠가 검진을 받는 동안 엄마랑은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 공원을 살랑살랑 산책하면서 단풍을 즐겼다. 엄마와 이런 여유로운 시간을 가진 것도 오랜 만이다.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텍스트 너머의 일화들을 들으며 우리 엄마아빠 참 열심히 지내셨구나 싶었다. 다음주에 자격증 시험도 앞두고 계신 엄마. 마치 내가 어릴적 시험기간에 공부거리를 챙겨다녔던 것 마냥 엄마도 핸드백에 모의고사 1회분을 쏙 넣어 오셨다. 귀여움도 있고 존경스러움도 느껴지고.. 분리해내기 어려운 감정들이 스쳤다.
올림픽공원은 오징어게임 패러디로 한창이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의 술래인 영희 동상이 한복판에 있었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초록색 추리닝과 붉은 점프수트에 가면을 쓴 사람들로 즐비했다. 엄마랑 깔깔 웃으면서 '오징어게임의 열기가 대단하긴 하구나' 했다.
공원 한 쪽에는 지압돌길이 있었는데 어느 금발의 외국인 아이가 맨발로 아장아장 걸어가더라. 그의 엄마도 신을 벗고 뒤 따라 걸어가는 모습을 한동안 바라봤다.
그쯤 아빠의 검진은 마무리가 됐고, 곧 바로 확인 할 수 있던 결과들은 일단 건강하다고 했다. 이런거 보면 아빠가 정말 건강관리 하나는 누구보다 자신있게 잘 해오신 것 같다. 매일같이 뜸하고 108배 하고 아침 점심엔 볶은곡식으로 만든 떡을 챙겨드시고 군것질류는 절대 하지 않기, 저녁엔 금식하고 운동하기, 자전거와 걷기 등등 유산소와 근력 운동을 고루고루 하신다. 잠도 불면증 없이 잘 주무시는 편에, 매일 정해진 시간에 취침하고 기상하는 것을 잘 시키신다. 무조건 밤 10시에서 새벽 2시에는 잠에 들어야 좋은 호르몬들이 나온다며 내게도 늘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길 누누히 말씀하셨지만 난 새벽 2시에 자리에 눕는걸....ㅎ
이런 아빠가 우리 아빠라서 참 좋다. 비록 아빠의 강단있는 의지를 전부 닮지는 못했지만 충분히 귀감이 된다. (당연히 엄마도!) 아빠는 아픈 것도 잘 참아내시고 이 세상의 고됨을 어떻게 넘겨보내며 살 수 있는지 스스로 잘 아시는 느낌. 요즘들어 부쩍 내 몸이 무거워지고 소화력이 200%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았는데 아빠가 "많이 먹을 수록 위는 끝없이 늘어나니 소식하는 습관을 가져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오늘은 점심 때 먹은 게 아직도 배가 불러서 저녁을 거르고 내일 아침을 맞아보려고 한다. 그리고 매일 꾸준히 걸어야지.
요즘 볼수록 부모님이 점점 귀여워지는 것 같다. 부모님을 뵐 때마다 편하게 호강시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망 좋은 호텔에서 맛난 식사를 대접해 드리고 싶고, 아기자기한 텃밭이 있는 전원 주택을 지어드리고 싶고, 해드리고 싶은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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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과 삼청동 드라이브를 하고 오는 길에, 운전 한지 5년 만에 처음으로 차를 긁었다. 나의 부주의함으로 집 근처 가게 앞에 세워진 큰 둥근 화분에 스크래치를 냈다. 내 자존심이 긁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차를 참 깔끔하게 다루시는 엄마는 꽤 속상하셨을텐데도 나를 위로해주셨고 나의 긴장을 충분히 공감해주셨다. 아빠는 '이렇게 실수하면서 배워가는 거'라며 지혜를 주셨다. 앞으로는 내 뒷바퀴가 어디에 있는지 항상 신경쓰면서 운전할 것. 차선을 변경할 때는 백미러에 차가 보일 때 이동하고, 주행할 땐 차선의 가운데를 잘 지켜가기 등등. 고맙고 죄송했던 시간이었다.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더 보내고 싶었지만, 한창 은행이 무르익어가는 철이라 아침에 부랴부랴 다시 부여로 내려가시게 돼서 많이 아쉬웠다. 집안일도 좋지만 부모님이 본인들의 여가를 더 즐기면서 사셨으면 좋겠다. 몸도 예전같지 않을텐데 (두 분 다 키도 거의 3센티 정도 줄어드셨다) 일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하시는 것 같아 속상하기도 하다. 건강하게 한 35년 정도만 더 사셨으면 좋겠다. 한 번씩 볼 때마다 함께한 시간보다 남은 시간이 더 적은 것 같아서 목이 메인다.
부모님의 지혜를 더 많이 전해받고, 시간을 함께 많이 보냈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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