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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습관 만들기/운동

[복싱어게인] 018일차 9월 1일(수) - 첫 스파링, 그리고 혼란

by peregrina_ 2021.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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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권태롭던 내 마음이 관장님께 읽히기라도 한걸까? 전혀 예상치 못한 시기에 드디어 링에 올라가게 됐다. 그동안 조만간, 조만간, 링에 올라가 볼거라는 관장님의 말씀은 있었지만 그래도 두어 주 정도는 훈련이 더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그렇지만 내 복싱메이트와는 오랜 만에 함께- 운동을 가서 연결 동작 위주로 펀치를 연습했다. 그리곤 몸 풀기가 끝날 무렵 예고 없이 "링에 올라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네??"

"링에 올라가~ 이제 올라갈 경력은 됐어"

"헉.."

"빨리 와서 글러브 이거 껴"

 

아무래도 손목 등을 잘 보호해야 돼서 그런지 내가 쓰던 입문자용 글러브가 아닌 몇 단계 업그레이드 된 글러브를 받았다. 상대는 체육관에서 나와 그나마 비슷한 실력의 입문자 분이었다. (내 생각에 그 분이 더 오래 배우고 잘하시는 것 같지만..) 우리 둘 다 스파링은 처음이었고 처음인 만큼 얼굴과 몸통을 제외한 양팔만 공격 범위에 해당 됐다. 마치 펜싱에서도 세부 종목에 따라 인정 되는 공격 범위가 다른 것처럼 말이다.

 

잔뜩 긴장감을 안은 채 서로 글러브로 맞인사를 하고 라운드를 시작했다.

 

샌드백으로 연습할 때는 얼굴이나 몸통을 맞춘다는 생각으로 펀치를 하기 때문에 팔만 공격하려 하니 상당히 어색했다. 그리고 상대방도 계속 움직이니까 정말 팔과 다리를 멀리 쭉쭉 뻗어야 공격에 성공할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높아진단 걸 느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듯 한 번의 실전 경기가 다음 레벨로 가기 위한 훈련을 더 효과적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리고 왜 그렇게 매일 같이 줄넘기와 근력 훈련을 강도 높게 해야 하는지도 단번에 이해됐다. 3분의 라운드 동안 생존하기 위해서는 한시도 한 눈을 팔거나 스텝을 멈춰서는 안되는데, 그냥 쉬지 않고 줄넘기를 3분 할 때랑은 체력 소모가 차원이 다르다. 혼자 샌드백 치면서 연습할 때는 조금 힘들면 숨 고르는 정도의 쉼을 가지곤 했는데 실전에서 그랬다간 얄짤없이 K.O.패다.

 

경기 후반으로 가자 점점 다리에 힘이 풀리고 정신도 혼미해져서 쉽사리 코너에 몰렸다. 그리고 상대 선수와 나의 신장 차이가 조금 있었는데 상대가 눈높이 정도에서 공격 쨉-을 하면 내 하관과 목 부근에 딱 맞았다. 원래 이번 게임에서는 팔만 타겟으로 하는게 맞지만 입문자들끼리 서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공격을 하다보면 엉뚱한 곳으로 펀치가 가는게 당연할 것 같다. 그렇지만 헤드기어 없이 꽤 여러 차례 얼굴을 직격으로 맞으니 아프기도 아팠지만 감정이 조금씩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맞을 때마다 내가 이런 운동을 왜 하고 있는건가 회의감이 수 차례 들었다.

 

사실 작년에 처음 복싱을 배운다고 했을 때 아빠는 반대하셨다. 내 일평생 아빠로부터 '하지말라', '안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처음 있는 반응이었다. 장난으로라도 누군가를 때리는 일체의 행동은 해선 안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틀린 말씀이 없었지만 그 당시엔 갓 끊어둔 3개월치 회비도 있고 샌드백 조차 칠 일이 없는 초보였기 때문에 그냥 운동을 계속 나갔다. 그리고 코로나로 인해 1년 정도의 텀을 가진 뒤 올해 다시 배움을 이어나가던 중이었다.

 

돌이켜보면 예전에 펜싱을 할 때도 동작을 혼자 연습하던 때와는 달리, 경기를 뛰다가 부상을 입으면 서로 좌불안석 하기 일쑤였다. 찌른 사람은 미안해서, 맞은 사람은 상당히 아프고 속상해서. 칼 끝에 골반이 찔려 퍼런 멍을 며칠 안고 지낼 때는 이게 영예로운 상처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근데 꼭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경기에서 감정이 상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이번 도쿄올림픽 펜싱 금메달리스트 선수들도 예능에서 비슷한 경험담을 나눈 적이 있었다. 물론 프로 선수들은 그 감정이 밀려오더라도 스포츠 정신으로 잘 승화할테지. 펜싱이 신사의 스포츠라 불리지만 교묘한 심리전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특징에서 만큼은 개인적으로 '신사'라는 수식을 그리 동의하긴 어렵다.

 

아무튼 다시 복싱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첫 스파링을 통해서 가치관의 충돌을 겪게 됐다. 그간 내가 복싱을 좋아했던 이유는 '누군가와의 겨루기에서 이기는 짜릿함' 때문이 아니라 어느 운동보다도 '온전한 자기 집중의 시간을 통해서 나의 한계를 조금씩 이겨내는 희열'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파링은 그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었기에 궁금증 하나로 열망해온 대상이 아니었나 싶다. 내 감정을 다스리고 싶어서 -스트레스들을 쌓아두지 않고 건강하게 풀어내고 싶어서- 계속 빠져들며 하던 운동인데, 때리고 맞으면서 되려 감정이 담겨 나온다면 본래 취지와는 다른게 아닐지 우려가 된다.

 

모르겠다. 스파링을 거듭하면서 스포츠맨십을 기르는 것도 훈련의 과정일텐데. 아직 처음이라 그런걸지 실력을 계속 쌓아가도 변하지 않을 생각일지는 조금 더 지켜보는 수밖에 없겠다. 

 

 

모쪼록 KF94 마스크까지 끼고 경기를 하니 정말 심장이 터질 듯 숨쉬기가 어려웠던 날이었다. 그래도, 임나리 좀 더 성장했네. 기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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