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방에 통돌이 세탁기를 대신해 드럼 세탁기가 생겼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삶의 질이 최소 한 단계는 상승한 것 같다. 예를 들어 섬유유연제 넣을 타이밍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거나 세탁을 위한 동선이 매우매우 줄어들은 것, 이전 세입자들이 쓰던 세탁기가 아닌 내가 처음 사용하는 것이라는 위생적 이점은 물론, 온수관이 새로 연결된 것도 정말 좋다!
베란다에 있던 수납장을 하나 들어내고 김치냉장고와 나란히 세탁기를 배치하니 공간이 전반적으로 화이트 톤에 규칙감이 더해져 훨씬 깔끔해졌다. 딱 내 스타일. 비록 관리비가 덩달아 올랐지만 이 정도의 쾌적함을 위해서라면 만족스러운 편이다.
신/구형 세탁기를 반출입 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깨달음이 있었다.
현재 나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의 4.5층에 거주 중이다. 새로 세탁기를 놓을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임대인과 함께 수납장을 1층으로 옮기던 중 이 곳에 입주하던 날이 생각났다. 당시 코로나가 한창 퍼지기 시작하던 참이라 계획과 달리 사람을 구하지 않고 아빠와 엄마, 나 셋이서 모든 가구를 옮겼다. 평소에 아픈 내색이나 힘든 내색은 전혀 안 보이시는 아빠가 그 날 밤엔 예순 평생 ‘죽을만치 힘들었던 날’이라고 회고하실 정도로 작업의 강도가 하늘을 찔렀다. (원래도 나 혼자 택배를 부치며 이사를 잘 다녔던 터라 가족들도 이 정도로 힘들 줄 모르고 그냥 셋이서 야곰야곰 옮겨보자!했는데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이란.. 정신과 육체 건강에 해롭더라.. 평생 아빠께 감사하고 죄송한 날로 기억될 것 같다.)
그 날 처럼 아빠 생각이 많이 나서 임대인께 “이사하던 날이 생각나네요. 정말 힘들었는데…”라고 말했다.
“그래서 공부하는 거죠. 이런 무거운 물건 안 들려고요.”
“아.. 네..”
수납장이 빠져간 공간에 왠지 모를 씁쓸함이 남았다.
이튿날 건장한 두 배송 기사님이 호흡을 가삐 내쉬며 세탁기를 들고 올라오셨다. 그 다음날엔 설치 기사님이 통돌이 세탁기를 수거해 가시며 또 거친 숨을 몰아쉬셨다. 역시나 그 날의 아빠 생각이 많이 나서 -그리고 우리 오빠 또래로 보이는 분이라 오빠 생각도 나서- 도와드린답시고 세탁기 윗부분을 붙잡으며 계단을 함께 내려갔다. 하지만 나의 도움이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를 정도로 기사님은 숨을 가삐 내쉬셨다. 하필 그 타이밍에 임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길래 "세탁기 철거 작업을 도와야 해서 조금 이따가 통화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리니 "그걸 (기사님 혼자 않고) 본인에게 도와달라더냐"고 물으시더라. 엊그제 수납장을 철거할 때는 나의 도움 사격을 필요로 하신 분이... ㅠ_ㅠ
그렇게 지난 며칠 간 마음이 불편한 상황들을 매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에 살아 죄송한 마음을 담아 마침 집에 딱 두어 개 남아있던 음료와 물을 한 잔씩 건네드렸다. 그리고 새 비닐이 붙어있는 세탁기를 보며 다짐했다. 다음엔 타인을 위해서라도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에 살아야겠다고.
그리고 한동안 임대인과 나눈 짧은 대화가 머리에 맴돌았다. 소위 3D 직종에 종사하지 않으려고 공부한다는 것,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인생이 어디 내 뜻대로 될까… 물론 공부를 많이 할 수록 더 다양한 기회를 얻을 경우의 수가 많아질 순 있으나,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누구나 육체적으로 힘든 일에 몸 담가야 할 상황이 생길 수 있다. 현재 그 사람이 속해있는 곳이 그 사람의 지난 인생을 꼭 대변한다고도 생각하지 않기에, 그 말의 이면에 담긴 것들이 참 씁쓸하게 다가왔다. 마침 얼마 전 붕괴한 아파트 건설 현장이며, 용광로 세척 작업을 하다가 운명하신 근로자가 떠올라 마음이 더욱 편치 않았다.
내가 설령 가방 끈이 길지 못하다고 해서 타의에 의해 조성 된 열악하고 부당하기까지 한 환경에 처하는 것이 정당화 될 순 없지 않는가. 가깝게는 거리의 환경 미화원도 이 경우에 해당될 수 있겠다. 일본에서는 여느 공무원처럼 평일 오전부터 저녁까지 밝은 시간대에 쓰레기 수거 작업을 한다고 한다. 한국은 미관상의 이유 등으로 미화원은 거리에서 보여서는 안되는 존재 마냥 자정 녘에야 주로 활동을 해야 한다. 벌써 몇 해 전에 주간근무가 도입된다고(일부는 되었다고) 했지만, 여전히 종량제 쓰레기 봉투에는 저녁 6시 이후에 쓰레기를 배출하도록 하게 되어있다. 서울의 경우 몇몇 구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작업 환경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여전히 내가 사는 동네에는 새벽녘에 형광 유니폼을 입은 분들이 쓰레기를 수거해 가신다. 여러 뉴스와 인터뷰들을 보니 확실히 낮에 근무를 하면 야간 대비 작업 중 유리조각에 찔리는 등 크고 작은 사고가 많이 줄어든다고 하더라. 거리를 늘 깨끗하게 해주시지만 정작 낮에는 거리에서 내몰린 거리의 영웅들. 어떻게 해야 이런 여건들을 바꿀 수 있을까.
직종 무관, 자본에 눈이 먼 일부 경영자로 인해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는 것 등 사회엔 자본주의의 사각지대가 너무 많다. 유명한 삼풍백화점 붕괴를 비롯한 씨랜드 화재, 서해훼리호 침몰 등등. 소수의 이득을 위해 다수의 희생을 막는 제대로 된 제도와 날카로운 시선들이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엔 이런 날이 과연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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