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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지/일상 속 생각

예정에 없던 단발

by peregrina_ 2021.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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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자정, 그러니까 수요일이 되는 밤부터 앓아 누워 꼬박 1박 2일을 보내고 일어났다. 

 

지난 금요일 랩미팅 발표를 시작으로 화요일까지 가히 열 손가락을 몇 번 접었다 펴야 할 정도의 일정을 소화하고 체를 하고 만 것. 그냥 피곤해서 그런거야 라고 넘겨짚은 것이 화근이었다. 오한과 몸살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설 연휴, 집에 내려가려고 예매했던 버스를  미루고 미루다 모조리 취소해버렸다. 컨디션이 회복되기 전에 움직이면 일상을 쉽게 영위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그 사이 자취방은 나의 허물들로 정신이 사나워진지 오래였다.

 

같이 기숙사를 써본 친구들은 너무나 잘 알겠지만, 나는 내 공간을 항상 깔끔하게 유지해야 내적 건강함을 느끼는 타입인데 그 공간이 어지럽단 것은 정신없는 내 삶을 반증한다. 입었던 옷을 제자리에 넣을 에너지 조차 없었던 시간이었다.

 

 

나를 둘러싼 헌 것에 실증과 귀찮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제 몫을 다 하고 버려진 쓰레기들을 비워내고, 옷가지와 식기류의 기름 때를 씻어내며 서랍장을 새 것으로 채우고자 노력했다. 차츰 집안이 정돈되고 나니 거울 속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1년 반 전의 탈색모가 여전히 어깨에 걸터앉아 있었네. 친구들이 옴브레 같다며 꽤나 예뻐했던 머리인데 정성어린 손길을 주지 못하니 빛이 바래보일 뿐이었다. 곧장 문을 연 미용실에 찾아가 단발로 잘라달라고 말했다.

 

"이별은 언제나 아프죠?"

 

노란 머리가 싹둑싹둑 떨어져나가는 모습에 '충분한 마음의 준비가 부족했었나' 아쉬움으로 마음이 눅눅해지려던 참에 미용실 언니가 말을 건넸다. 그러게. 머리카락이랑도 이별을 하리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네. 까만 머리만 남겨진 단발이 조금은 싱겁게 보이지만 새 것 같은 이 느낌 어딘가 애정이 간다.

 

 

사진 찍을 일도 없는 요즘이지만, 마지막 모습은 남겨두고 싶었다.

 

 

새해, 특히 설날에 많은 의미를 두지 않지만 이번 연휴는 허물을 벗고 한 층 성장하는 시간이 될 것 같다. 며칠이지만 잠시 힘에 부쳐 아프고 나니 그동안 바삐 지내느라 생각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한 살 더 나이 먹을 준비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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