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 초부터 상당히 아픈 후 (기력이 바닥이었다고 하면 딱 적절하겠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계획없이 본가에 내려갔다. 몸이 괜찮아졌다고 생각해서 부모님도 뵐 겸 출발했는데 이동하면서 컨디션 난조를 느끼고, 집에 도착해서도 꼬리 흔들며 달려오는 순돌이를 반갑게 맞이하지 못했다.
그래도 따뜻한 떡국을 먹고 쉬니 차츰 괜찮아졌다. 식사 후 부모님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빠의 고장 난 핸드폰, 대안을 마련 해야겠다 싶어서 갑작스레 만장일치로 서울행이 결정됐다. 집에 도착한지 불과 3시간 만이었다. 불편한 고속버스 말고 우리차 타고 편안히 서울에 올라갈 수 있겠다는 기쁨과 동시에 응? 나 집에 뭐하러 왔지?ㅋㅋㅋ 싶은 마음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산책 한 번 못 나가고 나와 작별을 해야 했던 순돌이의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서운해 보였다. 미안함을 안고 차에 올라타 4시간여 만에 자취방에 도착했다. 계획없이 집에 내려갔던터라, 미처 다하지 못한 정리를 부모님께 과감없이 보여드려야 했다. 스스로는 상당히 깔끔하게 지낸다고 자부하는데 “너가 이러니 아팠지!”라는 반박 불가스러운 핀잔을 듣고 배시시 웃었다. 아니 근데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기도 하네.. 아프니 이것저것 손 대기 귀찮은 것도 맞고 손 댈 정신이 없으니 아파진 것도 맞고..? 아무튼.
정식으로 자취를 시작하고 이 곳에 둥지를 튼지도 곧 만 1년, 그리고 부모님의 방문은 3번째다. 언제나 그랬듯, 엄마의 손이 닿는 곳은 마법처럼 모든 것에 윤택이 흐르고 냉장고는 풍요로워진다. 아빠의 손이 닿는 곳은 뚝딱뚝딱 편리함을 완비한다. 나는 정작 잊고 있던 불편함을, 부모님은 꼭 기억해두셨다가 항상 필요한 물건을 챙겨 올라오신다. 특히 이번엔 현관에 놓여진 헤드랜턴을 보고 아빠의 섬세함에 큰 감동을 받았다.
우리의 가장 큰 목적이었던 핸드폰 미션을 완수하고 돌아와 복작복작 저녁을 먹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크게 느끼지 못했지만 상당히 고요한 주택가에 위치한 자취방이 아빠께 새삼 새롭게 다가왔던 것 같다. 무드등 아래 "이 곳 참 고요하네" 하며 운을 띄우시는 아부지. 옛적에 일 때문에 상경해 상당히 소란스러운 공간에서 머물던 사흘의 기억을 꺼내셨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아빠의 경험담이었다. 놀랍게도 그게 나의 꼬마시절 이야기였다니. 엄마가 어린 언니랑 나 데리고 여자 셋이서만 집을 지키는게 너무 무서웠다는 말씀을 하시니 어렴풋 그 때의 잔상이 떠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아빠의 일담을 흥미롭게 들으면서도 한 편에는 내가 아빠에 대해 알고 있는 것보다 모르는 배경들이 얼마나 많을까? 싶어 마음이 찡- 해졌다. 아, 우리 아빠 이런 모습도 있으셨구나. 그 과정에서 어떤 것들을 느끼셨을까? 마음은 어땠을까? 궁금한게 참 많아졌다. 그러고 보니 부모님과 이런 대화의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했구나 싶었다. 어릴 땐 공부한다고, 대학에 와서는 한 두 달에 한 번 주말에 잠깐 집에 왔다 서울에 돌아왔으니 물리적으로도 부족한게 사실이었다. (전화로는 낯간지러워서 못하고 만나서도 매한가지..)
그래서인지 그 어느 때보다 자취방에서 온기를 나누며 함께하는 이 시간이 너무 소중했다. 세면대 물 흐르는 소리, 따뜻한 찌개 끓는 소리, 스킨 바르는 소리, 드라이 하는 소리.. 그 모든 소리들도 어여쁘게 집안을 가득 메웠다. 잠에 드는 그 시간마저 행복했다.
이튿날 오전 일찍 부모님을 배웅해드리고 집에 돌아오니, 냉장고 독창 소리가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유난히 더 크게 들리는 것 같고 집안의 적막이 어색하고, 단잠에서 깬 것 같았다. 함께 있을 때의 행복이 크면 혼자 있을 때의 행복을 느끼기까지 예열이 느려서일까. 부모님의 세 차례의 방문 모두, 혼자 집에 돌아왔을 때 복합적인 감정선을 따라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감사와 행복, 뭐라도 더 해 드리고 싶은 마음, 오래 함께하지 못하는 아쉬움 등등. 그 이유는 하나로 정의할 수 없을테지만 이런걸 사랑이라고 불러도 되겠지.
문득 엊그제 내가 잠시 화장실에 가는 동안 아빠가 "나리가 이제 스물 여섯인가?" 하고 엄마께 조용히 물어보신게 생각난다. 그 말을 들으면서 그 때의 부모님은 어떤 기분일지 상상이 안가더라. 배 아파 낳은 자식이 혼자선 아무것도 못하는 갓난아기 시절을 보내다가 차츰 걷고, 뛰고, 품을 떠나 나이를 드는 모습을 본다는게. 말도 안 듣고 속을 썩이기도 하는 그 모든 시간들을 내리사랑이란 이름 하나로 포용할 수 있는 마음에 위대함을 느꼈던 순간이었다.
막내로 태어나 부모님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오빠보다 무려 7년이나 적어 속상해하던 어린 시절들이 있었는데, 돌이켜보면 지금은 그 7년에 준하는 시간을 어느 정도 채운 것 같다. 새해가 되고 내 한 몸 챙기기 바빠 가족들에게 소홀했는데 모처럼 온기를 느끼니 얼어붙어있던 몸이 좀 녹는다. 오늘의 잠자리는 다소 허전 할지라도 말랑이는 마음으로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해야지.
다들 얼었다 녹았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 아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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