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석사 1년 차가 끝났다. 작년 요맘 때는 진로 고민의 늪에 빠져 허우적 거렸는데, 지금에서야 돌아보니 치열하게 고민하던 내 모습이 귀엽게 느껴진다. 별거 아닌데 참, 그 땐 몰랐지. 알 수가 없었지… 생각해보면 이렇게 조금씩 깨닫고 성숙해가는게 인생의 묘미인 것 같다.
지난해 그 늪에서 빠져 나오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대학원에 입학하면 바로 벗어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늪에선 내 발자취도 안보이고 표지판도 보이다 말다, 지나가는 행인도 드물었다. 뭍으로 나오는 데에 한 학기를 다 보냈다.
< 첫 번째 종강의 기록 > 2020.12.23
드디어 첫 학기가 끝났다. 유독 끝이 안 보이던 시간이었는데, 어느 새 컵라면을 후루룩 먹어 넘기듯 종강이 찾아왔다. 입으로 들어갔는지 코로 들어갔는지도 모르게.
음. 적응력 하나는 단연 자부하던 나인데 유독 이 곳 생활은 좀처럼 적응이 쉽지 않았다. 뭐랄까. 제2, 제3 외국어까지 능숙한 이들로 가득한 상황에서 겨우 가나다만 읽을 줄 아는 난, 똑같은 원생이란 이름 하에 그들과 같은 보폭을 보여야 했다.
매일을 맨 땅에 헤딩 하면서 피도 많이 흘리고 멍도 꽤나 들었다. 스물 세 살 적 나였다면 지레 겁먹고 도망 갔을텐데 두 번은 무너지고 싶지 않아서 마음을 단단히 묶어두었다. 이것 하나 못 이겨내면 세상 어떻게 살아갈까 싶어서. 그런데 가두면 가둘 수록 내 일상에서 나는 사라졌고 점점 깊은 터널 속으로 빠져들 뿐이었다.
‘어둠이 곧 얻음’이라 생각했다. 문구를 거울에 붙여두고 매일 읽었다. 그리고 아침마다 ‘나를 지켜내는 인생의 공식’ 따위의 책들을 꺼내들고 노트에 문장들을 꾹꾹 눌러 담았다.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책을 읽는 아침 그 시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누군가에게 기댈 틈 조차 없었던 것 같다. 1분 1초가 얼마나 귀중한지를 느끼고 나니 감히 누군가를 붙잡고 시간을 내어달라 청할 수 없었다. 코로나까지 한 술 더해 이번 학기는 대부분의 끼니를 혼자 해결하며 외로움까지 극에 달했다. 사람을 만나면서 에너지를 얻는 내게 버거움이 배가 될 수 밖에 없던 터였다.
그래도 이제, 1인분 몫은 다 못하더라도 그 몫을 어떻게 채울 수 있는지는 알게 된 것 같다. 분 단위로 일과를 기록하기 시작한 것도 처절히 이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한 노력이었다. 일정 궤도에 오르기까지 기다려준 빅웨이브 동료들에게도 너무 고마울 따름이고, 가까이서 손 잡아준 학교 친구들, 목 놓아 마음을 털어낼 수 있도록 안아준 사람들, 모두에게 고맙습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해낸 나.
정말 수고했다. 토닥토닥.
#빨리달리기는못해도 #꾸준히걷기도사
반 년 만에 뭍으로 올라오니 햇빛은 눈부셨고 개나리부터 벚꽃까지 온 세상이 형형색색으로 아름다웠다. 이번 학기에 대한 전반적인 기억이 꼭 그렇다. 화사함이 가득했던 봄과 같았다. 작년과 주변 환경들도 달라졌지만, 무엇보다도 내 마음에 여유가 깃든게 가장 큰 변화의 요인이었다.
혼자선 할 수 있는게 아무 것도 없다고 느껴지던 때엔 자존감이 맨틀을 뚫고 내려갔지만, 나의 작은 진전에 집중하고 타인의 도움에 의해서라도 해낸 성취를 기뻐하다보니 "어떻게든 결국 해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포기하지 않고 지난 학기를 무사히 마친 내 자신이 '결국 해낸 산물' 그 자체였다. 덕분에 이번 학기는 그런 과거의 내가 현재를 살아가는 나에게 항상 큰 힘이 되어주었다.
혼자와의 시간을 잘 감내하고 나니 고맙고 새로운 인연들도 많이 찾아왔다. 매일 zoom에서 열린 빅웨이브 야심한 공부방을 필두로 새벽공부방 친구들까지,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잠드는 시간까지 행복할 기회가 부쩍 늘었다. 물론 나의 행복을 외부에서 찾은 건 결코 아니다. 언제나 손 뻗으면 닿을 곳에 나를 아끼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코앞에 닥친 하루를 살아내기에 빠듯해 손을 움켜쥐고 있던 건 온전히 나였다. 그 땐 내가 내 자신을 아껴줄 여력이 없었다. 아마 지난 학기에 이 공부방이 생겼다면 그들과 지금과 같은 관계를 맺지 못했을거다.
결정적으로 마음에 여유를 가지기 시작했던 계기는 지난 설 연휴 즈음에 있었다. 번아웃과 함께 몸살을 경험하곤 만사를 제쳐두고 나를 챙기기에 몰두했다. (그 맘 때 단발로 싹둑 자르고, 명상도 꾸준히 한 것) 그 때 학교에서 진로랑 기질 검사도 받아 보고는 해석가 선생님의 추천으로 개인 상담을 시작했다. 정작 작년에 혼자 애를 태울 땐 학교에 이런 시설이 있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내가 내 자신을 더 알아가고 싶다는 열망이 커졌을 때 좋은 기회를 만나게 돼 정말 감사했다. 덕분에 한 학기 내내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고 이 블로그에서 생각의 상당 부분을 풀어갈 수 있었다.
여전히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이 많지만 그래도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할 때 즐거운지, 행복할 기회들을 더 알게 됐다. 그래서 해야 할 일을 앞두고도 멀리 산책을 다녀오거나 경조사에 발걸음 하는 일에 큰 망설임이 없었다. 내 안에는 학생 혹은 연구자로서의 자아보다 '누군가의 나리'로서의 자아가 더 소중했기 때문에. (작년엔 생일을 즐기는 것 조차 사치 같았다. 잠시나마 학교 밖으로 날 꺼내준 친구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를..)
그래서인가? 지난 학기엔 종강과 동시에 뛰쳐가듯 바다로 드라이브를 갔는데 이번 학기에는 틈틈이 잔잔한 물결을 만나면서 기분을 전환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는 부산으로, 순돌이를 보내곤 군산에, 팀미팅 발표를 마친 날은 청계천, 프로젝트 발표를 끝내고는 한강, 종강일에는 석촌호수에 갔다. 방학하고 맞는 첫 주말도 탑정호로 드라이브를 다녀왔다.
아무쪼록, 졸업 필수과목들을 듣느라 재시험에 대한 부담이 적잖았던 학기지만 틈틈이 즐기면서 유종의 미를 거두어 참 기쁘다. 시험지 확인을 마치고 교수님과 박사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서야 비로소 종강이 와닿은 하루다.

이번 학기도 수고했다 나리 ☺️
다가올 1년은 또 얼마나 성장할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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