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됐나 보다. 부모님 결혼 기념일을 맞아 가족들과 서해로 드라이브를 다녀왔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비가 한 두 방울 똑똑 떨어졌는데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더니 하늘에 구멍이 뚫린 냥 폭우가 쏟아졌다.
가장 빠르게 와이퍼를 움직여도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야가 뿌얬고, 앞뒤로 오가는 차들은 헤드라이트를 켜지 않아서 상당히 위험함을 느꼈다. ‘이거 안되겠다’ 싶어서 몇 번을 고민하다가 비상등을 켰다. 그러자 동심원이 퍼져나가듯 삽시간에 새만금 방조제 위에 점멸등의 행렬이 이어졌다.
약속이라도 한 것 마냥 무언의 질서가 빗길 위에 삼엄히 깔렸고, 더듬더듬 서로의 존재를 파악하려는 모습에 순간 감동이 밀려 올라왔다. 다행히 십 수 km의 방조제를 벗어나니 거센 비가 조금 잠잠해졌다.
우산 없이 선유도 해변을 거닐다가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자 먹구름이 깊게 드리워졌다. 올 때 처럼만 조심히 가면 되겠지 생각하고 나섰는데 세찬 빗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어느새 아빤 주무시고, 엄마랑 한참 대화를 이어가다가 그만 빠져 나가야 할 분기점을 지나치고 말았다. 네비게이션을 못 본 것도 아니고 경로를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앞이 보이질 않으니 이 곳이 ‘그 곳’인지 알아차리기가 어려웠다.
아 근데 그 느낌 있지 않나. 쎄-한 느낌. 열심히 달리고는 있는데 왠지 반대로 가는 그 기분. 까미노에서도 그런 불길한 촉이 드는 순간, 지도를 보니 길을 한참 잘못 걷고 있어서 참 무서웠었는데 오늘이 딱 그랬다.
“뭐고 뭐고, 김제? 지금 전주가 왜 나오노. 여기 어디고.”
아니 ㅋㅋㅋ 부여를 가야하는데 집이랑 반대방향의 지명들이 표지판에 난무하는게 아닌가. 네비가 시키는 대로 왔는데 (물론 분기점은 잠깐 지나쳤지만) 전라도 중심을 향해 내닫는 이 아이러니는 무엇인지 벙찌기 시작했다. 여기가 대야역 근처라는데 내가 아는 대야는 세숫대야 뿐이고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만 굴뚝 같았다.
사실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특히 혼자 도보 여행 중도 아니고 가족들이랑 차를 타고 있는데 겁 먹을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점점 해는 저물고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온 몸이 긴장감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엄마랑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핸드폰 네비를 켜서 어찌저찌 서천까지 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자동차 네비 불신론자인 듯. 결정적인 순간엔 늘 녀석한테 데였다…)
네비가 2시간 연속 운전했다고 쉬어가라는 알림을 보내오던 즈음 마트로 피신을 갔다. 잠시 숨을 돌리자 급속도로 몰려오는 허기에 간식거리를 폭풍 흡입했다. 인간 네비(우리 아빠ㅋㅋㅋ)도 개운하게 깨어나시고 다시 힘을 얻어서 집을 향해 출발했다. 이 때만 해도 몰랐지. 이게 끝이 아니란걸.
아, 이렇게 황천길을 가나
다시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물벼락을 맞았다. ‘물싸다구’라는 표현이 가장 적합할 것 같은데 아무튼 그걸 맞았다.
한적한 도로를 얌전히 잘 가던 중에, 옆 차선에서 빠르게 달리던 차가 물웅덩이를 아주 깊-게 밟았다. 비 오는 날이면 옆 차선으로부터 물싸다구를 종종 맞긴 하지만, 그간의 것들은 한 스푼의 애교였다. 정말이지 4초간 세차장 기계 속에 들어가있는 것 같았다. 눈 앞에 보이는 건 운전대와 유리창을 타고 흐르는 거품끼 인 물 밖에 없었다. 도로 상황을 4초간 일절 가늠할 수 없다는 건, 눈을 감고 운전하는 것과 다를게 없다.
순간 머리가 새하얘지면서 ‘나 죽나?’, ‘가드레일 들이 박고 튕겨 나가다가 뒷 차가 와서 또 박으면 어떡하지?’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뭐가 됐든 가드레일 만큼은 절대 부딪히면 안되겠다고 판단하니 마음의 중심이 오른쪽으로 조금 기울었다. 억 겁 같이 느껴진 시간이 지나고 겨우 시야가 확보되자 내가 1,2차선의 중간 지점에서 달리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아찔했다. 한참 빠르게 지나갔을 것으로 생각했던 옆 차도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그 쪽도 많이 놀랐겠지. 아무 사고가 없었음에 안도의 숨을 쉬면서도, 세차게 움직이는 와이퍼 소리가 내 심장박동 같이 들렸다. 정말 뒷목이 뻣뻣해지고 빗길에 진절머리가 났다.
아주 짧지만 머릿 속이 아비규환이었던 상황에서도, 아빠는 주무시는가 싶을 정도로 전혀 동요되지 않으셨다. 난 기진맥진 혼이 나가있는데 아빠의 평온함이 신기해서 집에 와서 여쭤보았다.
아빤 아까 너가 어떻게 대처하는지 한 번 지켜봤어. 그 때 너 두 차선 중앙에서 달리고 있었지? 절대 그런 상황을 만들면 안된다.
아니 아빠 저는 혹시라도 중앙선 가드레일 박을까봐 왼쪽으로 가면 안된단 생각에 몸이 오른쪽으로 틀어진 것 같아요.
급커브 구간이 아니고서야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그럴 일이 없어. 차선을 유지하면서 반드시 악셀에서 발만 떼야해. 감속하겠다고 브레이크는 절대 밟으면 안된다. 빗길이나 빙판 위에서 타이어 휠은 그 자체로 할 수 있는게 아무 것도 없어. 무조건 악셀에서만 발을 떼면 안전하게 속도가 줄어들어. 알겠지.
네.. 아까는 제가 어떻게 했는지도 전혀 모르겠어요. 기억이 안나요..
그리고 운전할 땐 항상 사방을 예의주시하면서 웅덩이가 어디에 있는지, 옆에 차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파악하는 것도 네 몫이야. 너만 천천히 운전한다고 전부가 아니란 얘기야. 아까 옆 차가 먼저 지나가던 상황 맞지?
네. 맞아요.
그 때 네가 더 앞서 갔거나 조금 더 느리게 갔더라면 이런 일은 안 일어났겠지. 인정하니?
아..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네.
항상 신경 쓰고 주변을 읽으면서 운전해. 이것도 경험이야. 넌 아직 한참 쌓아야해. 눈비 오는 날은 타이어도 더 신경 써서 체크해야 된다. 알겠니.
네에..
면허를 딴 후로 5년 째 차에 기스 한 번 내본적도 없지만, 운전에 관해선 항상 아빠께 배워도 배워도 익힐 것이 많다. (생각해보니 몇 해 전에도 갑자기 브레이크 오일이 새서 아찔했던 기억이..ㅜ_ㅜ 그 때도 아빠 없었으면 우쨌을까.) 운동 신경이나 운전 감각 같은 센스들은 정말 타고 나신 우리 아빠.
넋이 나가는 하루였지만 그만큼 값진 교훈을 얻었다. 상대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능력은 도로 위에서 더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언제나 안전 또 안전합시다ㅏ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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