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부터 시작했던 대입 수리논술 첨삭 알바가 (예상치 못한 시점에서) 끝이 났다.
어제 손목이 저릴 정도로 7시간을 내리 첨삭하고 오늘 아침, 이번 달 마지막 채점분을 반납하러 노량진에 갔다. 답안 봉투를 제출하고 다음 달 채점 일정을 여쭤보니 2021년도 시험이 모두 종료 됐다는게 아닌가..? 어렴풋 친구가 아르바이트 소개를 해줄 때 여름 정도에 끝난다고 했던 기억은 있는데 그래도 8~9월까지는 시험이 있는 줄 알았다. 마침 시간 관리차 알바를 슬슬 관두려던 참이어서 잘 됐다 싶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작별한다 생각하니 내심 아쉬웠다.
고등학생 때 수능이나 논술 같은 시험을 제대로 준비해 본 적이 없다보니, 첨삭 첫 달에는 이 시험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에 시간이 무척 많이 들었다. 논술 문항이 어떻게 생겼는지 본 기억도 안나는 정도였다. 한 시간에 겨우 4매 남짓을 채점 하면서 최저 시급 각도 안 나오는 속도에 매 시간 엄청난 현타가 찾아왔다. 채점 하다가 푸념을 할 때마다 친구는 자동 응답기처럼 "하다 보면 는다"고만 격려했고, 믿기진 않지만 한 번 믿어보자 싶어서 꾸역꾸역 첫 달 분량을 마쳤다. 매달 문제 난이도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었지만 확실히 속도가 점점 붙어 3배 정도 빨라지긴 했다. (덩달아 손목도 나갈 것 같았지만..)
사실 처음엔 수기로 첨삭하는 이 일이 큰 의미 없는 단순 반복 노동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늘 응시자의 입장에서만 시험을 경험해봤지, 출제 의도를 바탕으로 체계화 된 기준에 따라 답안을 평가해 볼 일이 얼마나 있을까. 처음으로 출제자 편에 서서 보니, 정답만 훑어 봐도 이 사람이 문제의 핵심을 잘 파악했는지 아닌지가 판가름 됐고 답안을 조금만 읽어봐도 수험생의 개념에 대한 이해도가 얼마나 탄탄한지 단숨에 보였다. 참 신기하고 재밌더라.
나도 시험 인생만 20년을 보내며 그간 얼마나 많은 시험들을 치뤄보았겠나. 헷갈리는 서술형 문제가 나오면 부분 점수 조금이라도 더 받아보겠다고 온갖 단편 소설들을 쓰곤 했는데 지금에서야 돌아보니 깔끔하게 아는 것만 작성하는게 더 멋진 답안이었을 것 같다. (아 물론 모르는 문제가 나왔다고 풀어볼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아마도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군더더기 가득한 답안을 냈던거겠지.
그래서 학부 때 수강한 어떤 과학 교양에서는 '틀리면 감점'이라는 특이한 채점 방식이 있었다. 최저점이 0점이 아니라 음수(-)가 나온 케이스도 있다. 교수님은 "모르면 찍지 마라. 과학을 하는 사람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는 명언을 남기셨다. (그래서 그 학기 전공 시험에서도 모르는 OX 문항은 정직하게 찍지 않았던 나.. 대체 왜 그랬니..ㅋㅋㅋ)
아무튼 이번 첨삭 경험 덕분에 지난 학기에 시험을 볼 때도 가능한 한 채점 포인트들을 생각하면서 답안을 작성하려 노력했다. 확실히 가능하다면 출제자와 면접관의 입장을 경험해보는 것이 응시자로서의 역할을 재정립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아직 사회초년생이지만 일찍이 두 입장을 모두 경험해볼 수 있던 지난 날들에 깊은 감사를 느낀다. 함께 심사에 참여하는 교수님 등으로 부터도 사람을 보는 다양한 관점을 배웠고, 지원자의 자기소개서를 통해서도 사람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었다.
모쪼록 시험이나 면접을 앞둔 분들이 있다면, 모의 사고를 통해서라도 역지사지를 적용해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이 글을 읽는 모두가 원하는 바 다 이루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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