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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지/일상 속 생각

크리스마스 기차 여행

by peregrina_ 2021.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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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기차에 몸을 실었다. 버스를 제하고 탈 것을 오래 타는 걸 참 좋아하는 나. 몇 년 만에 한국에 온 언니와 가족들과 함께 외할머니를 뵙고 오는 길이다. 본가에 들르지 않고 혼자 서울에서 곧바로 오가긴 처음이었는데, 표면적으로는 길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서였고 더 근본적으로는 ‘혼자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근래 졸업 준비로 인한 심리 변화로 ‘잠시 쉬었다 뛰기’와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리기’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때마침 좋은 구실로 서울을 떠날 수 있는 주말을 맞았고 부모님께 “대구에서 보자”고 전하며 기차표를 끊었다.

칼바람이 스미는 크리스마스 아침, 열차를 타니 발 밑에서 뿜어 나오는 히터 열기를 따라 내 마음도 둥실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간인 한강을 건널 땐 베시시 넋을 놓고 차창을 바라보다가, 친구 E에게 선물받은 책을 꺼내 들었다. 한참을 읽다가 잠시 잠에 들고 깨서는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즈음 대구에 도착했다.

가장 좋아하는 구간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생 회고록. 러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깊은 공감을 바탕으로 삶의 태도와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환승한 버스에서는 산타 기사님을 보고 발걸음이 한결 더 가벼워졌고, 산타를 찾으러 떠났다는 길가의 상점 공지에 함박 웃음까지 피어났다.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는 우리의 산타
산타를 만나셨을지 궁금하다


그리고 졸업한 지는 여섯 손가락을 접어야 하는 시간이 흘렀지만, 언니가 할머니를 위해 센스있게 챙겨온 학사모와 가운 덕분에 저녁까지도 집에 계속 웃음이 머물렀다. 참 정이 많고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은 우리 언니. 몇 년 만에 가족들이 모여 밥 한 끼를 같이 먹을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하고 감동이고 선물 같던 시간이었다. 다음주면 다시 또 얼굴을 볼 수 있단 생각에 월요일을 맞을 힘이 난다. 마침 언니는 모레 내 자취방에 오기로 했으니 더 든든한 올 한 해의 마지막 주를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가족들 모두 건강하게 오래 함께 하기를 :)

보기만 해도 든든한 가족들의 뒷모습
참 좋았던 여유로운 창가석


돌아오는 기차에서는 대학원 진로에 대한 연재글을 읽었다. 연구실 선배가 며칠 전 추천해주었던 글이다. 열 편 정도 되는 시리즈를 완독하고 다이어리를 꺼내 나와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이 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왜 필요한지,… 이 생각들을 정리해서 조만간 L 교수님과도 송년 면담을 해야지.

요즘, 졸업 생각에 조바심이 많이 들었는데 홀로 기차에서 읽고 썼던 시간들 덕분에 이 마음을 억누르려기 보다는 이를 적절한 추진력으로 승화시켜야겠단 생각을 했다. 할 수 있다 나리. 마음이 번잡해진다면 앤카드로 세세하게 감정과 욕구를 이해하는 연습을 해보자. 결국 다- 해결되어 있을거란다. 삶에 별 빛을 섞어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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