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에 미국에 온 지 처음으로 마음이 복잡했던 하루를 경험했다. 친구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비해 유난히 언어 장벽이 크게 느껴진 시간을 보내고 자존심도 많이 상하고 속상했다. 오후 3시, 연구실을 벗어나 바깥 산책을 좀 하고 한적한 그늘가에 앉아 노래를 들으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눈물이 나는 슬픔은 아닌데 그냥 내 존재가 부정당하는 것과 비슷한 기분에 더해 스스로가 조금 미워지기도 했던 시간이었다.
그 날은 마침 또 동기지만 아직 친해지지 않은 미국 친구들과 같이 점심을 먹었는데 내가 발화를 하면 나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청자의 역할을 열심히 수행했다. 머릿 속에는 대화에 끼어들 이야기 거리가 있었는데 문법 생각, 단어 생각을 하다가 혼자서만 상상 속의 대화를 이뤄나가고 말았다. 그에 대한 아쉬움이 오후에 겪은 의사소통의 미스에 더해지니 가뜩이나 위축되고 자신감이 떨어진 것.
퇴근 길에 룸메 박사님께서 오늘 내가 겪은 일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며 '안 그래도 에너지를 써야 할 중요한 곳들이 더 많은데 사소한 일에 마음 쓰고 에너지를 빼앗기지 말라'는 위로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언니도 출국날 편지로 비슷한 얘기를 전해줬었지. 다 흘려보내고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친구들의 말을 빌리자면 소위 '어쩌라고' 마인드를 장착할 필요도 있을 것 같다. 껄껄.
집에 오는 길에 마트에서 닭다리와 맥주를 사와 불금을 보낼 간장 치킨을 만들었다. 그리고 석사 과정 때부터 정신적 힘이 되어 준 유튜버 돌돌콩님의 유학기 경험담 영상을 보면서 하루 한 걸음씩만 나아가 보자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래도 다음 날인 토요일에 친구들과 점심/오후 약속을 두 차례 보내면서 결국은 또 사람 덕에 고마움과 감사, 든든함을 느끼며 행복해지는구나를 느꼈다 (물론 외부인자에 의해서만 내면의 행복이 좌우되면 안되지만).
한 달 만에 앤카드를 꺼내보았다 (벌써 한 달이 흘렀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앤카드를 사용한 이래 처음으로 부정적인 감정 카드가 나오지 않았다. 나 인생 레벨 한 단계 성장한걸까? 예전에는 배움/성장, 전문성/숙달성과 같은 욕구 카드는 늘 나를 근심, 걱정, 불안 등의 감정의 원인이 되었는데 그것들이 처음으로 기대심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약 50일 정도 미국 생활을 경험한 결과 미국 문화, 특히 또래들 간의 친밀감 형성에 대한 문화가 아직 낯설고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데 그것들이 전반적으로 욕구 카드에 드러났다. 박사과정 학생들과는 어느 정도 나이대도 비슷하고 약간 성숙한 느낌이 전해지는데 아직 갓 학부를 졸업하고 석사를 진학한 친구들과는 어떻게 관계를 맺으면 좋을지 큰 고민이 든다.
그럼에도 나는 대학생으로서 유학생활을 하러 온게 아니니까 일단 가장 중요한 '연구'와 '학업'을 잘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고, 현재로도 충분히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으니 아직 친분이 충분히 쌓이지 않은 친구들과의 유대감까지 걱정하는 것은 시기상조가 아닐까 싶었다. 그저 관계에서 정성을 다 하되 나다움을 잃지 말고, 혹여 평등하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이 오더라도 흘려 보낼 것. 충분히 무르익지 않은 관계 보다는 오래금 내 곁에서 나를 사랑해준 한국 친구들과, 미국에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끼는 새로운 친구들과의 관계를 더 먼저 생각 할 것. 모든 것은 때가 되면 인연이 깊어지고 얕아지기도 하는 법이니까.
-
오늘은 이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일요일이다. 다음주 이 시간에는 학교 아파트로 이사를 가 있을 예정이라 모처럼 뒷마당에서의 시간을 알차게 보낼 예정이다. 아침(아니 점심)에 일어나서 텃밭에 있는 부추를 따서 손질하고 모처럼 뒷뜰에서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중. 요즘 호르몬의 지배를 받아서인지 12시간 가까이 잠에 취하고 몸이 붓는 듯한 기분을 자주 느끼는데 돌아오는 주에는 몸이 차차 가벼워지면 좋겠다. 벌써 9월도 마지막 주구나. 안녕.
'기록지 > 마음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앤카드] 24/01/26(금) - 유학 두 번째 학기 개강, 시간이 약 (2) | 2024.01.28 |
---|---|
[앤카드] 23/10/22(일) -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 social person (1) | 2023.10.23 |
[앤카드] 23/08/27(일) - 미국 유학 개강 첫 주를 보내고 (2) | 2023.08.28 |
[앤카드] 23/08/20(일) - 미국 박사유학 개강을 앞두고 (0) | 2023.08.28 |
[앤카드] 23/01/07(토) - 박사 유학 입시 1막의 끝 그리고 덕통사고 (0) | 2023.01.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