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꽤나 즐거운 학기 초를 보내고 있었지만 여러 친구 관계들 속에서 여전히 소수 인종 유학생으로서 외로움을 느끼는 순간들이 찾아와 정말 오래간 만에 카드를 찾게 됐다.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은 이 시간을 가지려고 했는데 그간 무엇이 그리 바빠 마음 돌보기에 세 달이 걸렸는지.

감정: 허전한&불안한 / 쓸쓸함 / 신경 쓰이는 / 무기력한&위축되는 / 담담한
욕구: 의지 / 관계맺음&친밀함 / 존재감 / 신체적 정서적 경제적 안정 / 새로움
이번 학기에는 조교를 맡고 있는 학부 수업을 제외 하고는 한 과목을 듣고 있다. 그리고 그 수업의 수강생 대다수는 내 동기들이다. 얼핏 들으면 동기들이랑 같이 공부하고 좋겠네! 싶지만 사실 내가 입학한 해에 괴상한 우리 과 신입생 구성으로 인해 몇 명을 제외하곤 아직 동기들이랑 친분이 거의 없다.
다른 학교 프로그램을 보면 PhD냐 MS냐를 기준으로 같은 학위 과정에 입학하는 신입생을 한 cohort로 보던데 우리 과는 PhD와 MS를 합쳐서 그냥 새로 입학하는 모든 대학원생을 같은 cohort라고 말하고, 내 cohort가 24명으로 학과 역사상 가장 큰 규모를 보였다. 처음 이 소식을 같은 과 한국인 선배로부터 접했을 땐, 선배가 동기가 많아서 잘 됐다고 했고 나도 무척 기뻤으나, 실상은 24명 중 4명만 박사 과정이고 나머지 20명은 석사생이었다. 이 기괴한 비대칭에 더해 그 4명의 박사 과정생 모두가 아시안이고 (그것도 나 제외하곤 세 명 모두 대만인) 석사 과정에는 두 명의 남미 출신 친구들을 제외하곤 전부 미국인이다. 콜로라도가 인종 다양성이 떨어지고 백인 위주의 지역이라는 건 잘 알고 왔으나 이게 대학원 동기들 분포에서 마저 고스란히 나타날 줄은 몰랐다.
여느 대학원 프로그램이 그러할 듯, 석사 과정은 보통 필수 코스웍이 많고 연구 보다 수업의 비중이 더 큰 편이고 박사 과정은 코스웍 보다는 연구에 더 집중하고 개인 연구 주제에 따라서 수강하는 과목이 상당히 달라진다. 다시 말해, 나의 경우 같은 동기라도 해도 그 중 겨우 4명만 박사 학생이고 나머지는 다 석사 과정이니 석사생들과 수업이 겹칠 일도 전혀 없었고, 국적 마저 너무나 달라 지난 학기 동안 그 동기들과 친해질 기회가 거의 없었다. 반면 석사 과정 친구들은 첫 학기에 필수 과목 네 개를 같이 듣고 엄청난 분량의 과제를 매주 함께 하다 보니 안 친해질래야 안 친해질 수가 없는 환경에 놓였던 셈이다.
한국에서 유독 동기사랑 나라사랑을 외치고 학부 입학 10주년 차에도 동기들 대부분이 엠티에 참석하는 유난히 끈끈한 동기애 속에서 자란(?) 나로서는 이런 괴이한 구조의 cohort라는 울타리가 견디기 참으로 어색하기 그지 없다. 지난 학기에는 그래도 박사과정 동기들이랑 수업도 같이 듣고 타과생들도 많이 듣는 수업도 있어서 오히려 classmate들을 사귀는게 편했는데 이번 학기에는 엄청난 과제에 collaboration까지 적극 장려하는 수업에 석사 과정 동기들만 가득 있으니 수업 자체는 정말 즐거우나 그 외적으로는 사실 마음이 편치 않다.
그 마음을 곰곰이 들여다 보니 강의실 안팎으로 든든하게 의지할 친구가 마땅치 않아 일종의 불안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 과제 같이 콜라보 할 친구가 있을까? 와 같은 고민- 그래도 랩실 동기가 이 수업을 같이 들어서 어느 정도 위안은 되지만 그 친구는 본인의 친한 무리가 따로 있고, 이상하리만큼 나는 유독 그 무리의 친구들과는 마음이 쉽사리 통하지 않는다. 그들 사이에만 있으면 나는 투명 인간이 되는 것 같고 위축돼서 존재감이나 자존감이라 불리는 것들이 작아지고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을 알고 있고 또 남은 학기 동안 많은 과제를 같이 해가다 보면 누군가와는 가까워지지 않을까 하고 담담히 있다.
어제 마침 학과 멘토 선배들이랑 저녁 자리가 있어서 이 고민을 털어 놓았는데 그들도 국제 학생으로서 '진짜 친구'가 생겼다고 느끼기까지 3년 가까이 걸렸다고 한다. 물론 그들은 코로나 시기의 타격이 크긴 했지만 스몰톡부터 해서 크고 작은 문화 차이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내 멘토 중 한 명은 필리핀 출신인데 나는 당연히 그 선배가 학과에서 꽤나 인싸이고 모국어가 영어니까 이런 어려움은 없었을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언어를 떠나서 성격이나 문화적으로, 친구 관계 형성에는 누구든 충분히 많은 노력이 필요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같은 미국인이라도 20대 후반의 박사과정 친구들은 갓 학부 마치고 온 20대 초반의 MZ 세대의 석사생들과 세대 차이를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인종 불문 세대 차이는 어쩔 수 없는 듯? 그래서 오히려 연차 있는 박사과정 친구들이랑은 지내기 편한데 아직 내 동기들은 어렵달까..ㅠㅋ
물론 대학원에 친구 사귀러 놀러 온 것도 아니고 내 본분을 잘 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중요하지. 그렇지만 내 삶을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 주위 관계들을 잘 쌓아가는 것도 여느 것 못지 않게 중요한데 그 점에선 소수 인종으로서 유학생활을 하는게 마냥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같은 인종을 찾아 한인회에 의지하고 싶다는 마음도 아니다. 그냥 학과에서 인터네셔널 만이 아니라 현지 친구들과도 마음 나누고 가깝게 지내는 날이 머지 않아 찾아오길 바랄 뿐..
덕분에 비주류 구성원으로서 주류들의 사회를 살아가는 입장을 조금은 더 헤아려 보게 된다. 한국에서 나는 줄곧 주류의 입장이었고 그렇지 않은 누군가에게 나는 그리 친절하지 만은 않은 존재였을 것이다. 친절은 분명 적지 않은 에너지가 드는 일이니까, 경우에 따라 나는 친절의 눈을 감기도 했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지금의 어려움은 나라는 개인의 그릇을 넓혀주는 값진 시간이 될 것 같다. 다음 신입생이 들어오면 나도 이런 마음을 잘 헤아리는 선배가 되어야지. 이런 맥락에서 내 멘토들이 항상 만날 때마다 잘 지내냐고 물어봤었구나... 서서히 깊어져가는 이런 관계 참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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