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와서 평일에 감정카드를 들여다 보긴 처음이다.
일상에서 크게 좋은 것도, 크게 나쁜 것도 없지만 집에서 제대로 쉬는 느낌이 들지 않고 평균치보다 낮은 감정이 지속되어 카드를 꺼내보게 되었다. '혼자 살고 싶다'는 감정은 작년 10월 말부터 줄곧 느껴온 거지만 이를 마주하는 날들이 근래 꽤 잦아져서 마음을 들여다 보고 싶었다.

현재 감정:
(1) 불편한, 신경쓰이는
(2) 불안한, 두려운
(3) 지겨운, 귀찮은
(4) 당혹스러운, 어이없는
(5) 될대로 되라는
원인 욕구:
(1) 자유로운 움직임, 혼자만의 시간
(2) 예측 가능성, 자기표현, 치유
(3) 일관성, 관계맺음
(4) 소통, 배려, 존중
(5) 평온, 무탈함
약 세 달 넘게 크고 작게 쌓여온 것들이 많아 여기에 다 읊을 수는 없지만 근래 룸메와 분갈이 이슈가 있었고, 지난 주말에 주방 환기와 관련해서 룸메가 불편한 기색을 비춘 후 며칠 째 집에서 나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 토요일에 갑자기 폭설이 내리며 날이 추워져서 몸 보신 겸 저녁에 쇠고기 미역국을 한 솥 끓였다. 한식을 상당히 좋아하는 룸메는 맛있는 냄새가 난다며 어떤 재료를 어떻게 조리해서 국을 끓이냐고 물어봐서 레시피를 간단히 알려주었고, 룸메가 방에 들어간 이후 저녁 식사를 마친 나는 한국에서 공수받은 마른 반찬들을 상하지 않게 한 번 볶아서 냉장 보관하는 작업을 거쳤다. 당연히 평소에도 그래왔듯 요리 중후로 베란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고, 적당히 환기가 됐다고 생각한 시점에서 창문을 닫고 방에 들어왔다.
밤 9시~반 무렵 룸메가 "거실에 향초를 두 개 켜둘 건데 자기 전에 내가 끌테니, 불 끄는거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말을 건넸다. 나는 알겠다고 했고 밤 11시가 넘은 시간에 화장실을 가려고 거실에 나갔다가 거의 2시간 가량 켜진 향초 냄새에 약간 머리가 아프려고 했다. 한 개는 자연스러운 핫초코 향이라 괜찮았는데 다른 한 개가 일반 양초를 태우면 나는 냄새라 개인적으로 조금 강하게 느껴졌다 (양키 캔들 같은 것 말고 다이소에서 파는 초 피우면 나는 냄새). 밤이 늦어 룸메가 자러 갈 시간도 가까워졌고 이미 향 두 개를 2시간 정도 피웠으니 한 개 정도는 꺼도 괜찮겠다고 생각을 해서 그 두 번째 양초를 껐고, 몇 분 후 룸메가 거실로 나와 나를 불렀다.
"향초 네가 껐어?"
"응, 조금 향이 강한 것 같아서 방금 껐어."
"이게 너한테 향이 강하다고? 유감이네. 근데 있잖아, 아까 너가 요리하고 난 후로 거실에 냄새가 나길래 (핫초코 향이 나는) 저 향초 하나를 켰었는데 하나 만으로 잡내가 안 사라지길래 어쩔 수 없이 얘까지 더 놓은거야. 그리고 원칙적으론 요리할 때 배기휀까지 추가로 틀어서 환기 시켜주는게 맞아." << fact: 둘 다 요리할 때 창문만 열지 배기휀은 진짜 가끔 틀음.
"아 그랬던거구나, 그러게 휀은 내가 틀었어야 했는데 창문만 열어놨었네. 냄새 나게 해서 미안. 앞으로 유의할게."
(룸메, 아무 대답 없이 침실 행)
룸메가 한식을 좋아하더라도 반찬 냄새가 외국인에게는 불편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유독 향에 민감한 룸메기에 (룸메가 이 집에 이사 왔을 때 먼저 살던 사람이 카레 요리를 하고 환기를 제대로 안 시켰는지 거의 한 달 내내 집 곳곳에서 카레 냄새가 나 미치는 줄 알았다고 몇 번을 말하길래 집에서 카레 못 해 먹음...)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전에 룸메가 몇 번 냄비를 태워먹고 며칠 간 집에서 탄 내가 났을 때도 나는 '밥 냄새도 나고 가끔 탄내도 나야 사람 사는 집 같지' 하며 음식 냄새로 한 번도 화두를 꺼내본 적이 없었기에, 이 짧은 대화가 썩 기분 좋지만은 않았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잠에 청했다.
그런데 이튿날 부터 룸메가 나를 본체 만체 하고, 내가 퇴근 하고 돌아와 방에 문 닫고 있는 룸메에게 "Hi xx~"하고 인사를 건네면 무뚝뚝한 "Hello."가 그녀 방문 틈으로 나지막히 기어 나오는 등 별안간 신경이 쓰이는 행동들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평소에 굉장히 하이텐션에 항상 노래를 흥얼거리고 질문 폭격기 수준으로 대화량이 많은 편으로서 이런 표식들은 무언가 불만이 많다는 시그널로 받아들여진다). 급기야 오늘은, 내가 사와서 공간을 일부 공유하고 있던 샤워렉에서 본인 샤워 용품들을 모조리 꺼내 비우기까지 했다 (대체 이건 왜???? 그리고 그 이튿날엔 내 신발장 렉에 있는 본인 신발도 다 치움). 내가 그렇게까지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아님 작은 실망들이 쌓여 터진건지? 내가 뭐가 됐든 미안하다고 사과해주길 바라는건지? 어쨌든 집에 있는 시간이 정말이지 불편하다. 그리고 몇 번씩 룸메와 자잘한 이슈가 있을 때마다 그는 내 방문 앞에서 고주파로 내 이름을 부르며 잠깐 시간 있냐고 불러내 잘잘못을 가리곤 했는데 '이번에는 과연 언제 불쑥 내 방에 찾아올까' 생각하며 방문 너머에서 어떠한 인기척이라도 들리면 촉각을 곤두서게 된다. 그녀 입에서 내 이름이 발화되는 상상의 환청과 함께..
그는 나보다 스무 해 이상을 더 살았고 이전에 교사 일을 했었는데, 그래서인지 어떠한 트러블이 생기면 항상 룸메는 훈계하는 선생님, 나는 혼나는 학생과 같은 관계가 형성 된다. 학창 시절 한 번도 나는 이러한 사제 관계를 경험한 적도 없었거니와, 유창한 언변가인 룸메에 비해 짧은 나의 영어, 그리고 대인관계 문제 해결에 미숙한 내 성향 등등이 종합되어 이런 상황들은 나를 상당히 불안하게 만든다. 그것도 편히 쉬어야 하는 집이라는 공간이 가장 불편하고 불안한 환경이 되니 요즘 부쩍 자주 기분이 다운되고 무기력하다. 혼자 살면 어떨까 줄곧 상상을 해본다.
내가 학교 아파트로 이사하는 날, 학부 과 선배님이자 미국와서 처음 하숙했던 곳의 박사님께서, "룸메가 불편하면 참지 말고 꼭 하우징 오피스에 호실 바꿔달라고 요청하세요. 미국은 시스템이 잘 돼있어요." 라고 당부를 하신 적이 있다. 하지만 1) 이 많은 짐을 옮길 생각하면 머리부터 아프고 2) 겨우 이런 일들로 상황을 모면한다면 루저가 아닐까, 사회성을 기르는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들에 매번 마음은 괴롭지만 망설여지게 된다. 추가로 3) 결국 같은 아파트 건물에 사는 이상 오고 가며 분명 서로 마주칠 텐데 이사를 나가는 이유는 무어라 설명할 것이며 종국엔 관계가 틀어진 채로 헤어지게 되지 않을까. 함께 아는 친구도 많은데 정말 불편하겠다. 친구들한텐 뭐라고 설명하지? 며칠 이러다 또 함께 깔깔 웃고 지내는 날도 오고 괜찮아질텐데.. 하면서 마음이 자꾸만 요동친다. 4) 피장봉호 (避獐逢虎). 더 난감한 룸메를 만날 가능성에 도박을 하고 싶지 않은 것도 있음.
혼자만 너무 마음 쓰는 건 아닌지, 'so what?' 마인드로 뻔뻔하고 당당하게 살 수는 없는지, 궁극적으로 내면을 어떻게 치유하면 이런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지 등등 고민이 많다. 타지 살이라 어려운 건지 그냥 몇 십 년을 다르게 살아온 누군 가와 함께 사는 건 다 이렇게 어려운 일인건지 모르겠다. 혼자 살면 이런 고민에 감정과 에너지 뺏기지 않고 해야 할 일에 더 잘 집중 할 수 있을텐데. 점점 집에 들어가기가 꺼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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